현실화되는 ‘D’의 공포… 한국 경제는 어디로 가야 하나
디플레이션 공포의 현실화와 대응
2008-11-25 ㅣ 여경훈/새사연 연구원
디플레이션 공포의 현실화와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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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의 물가와 실업률 추이
■ 10월 소비자물가 1퍼센트 하락 : 1947년 이후 가장 큰 폭의 하락
11월 19일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10월 소비자물가(계절조정치)가 전월에 비해 1퍼센트 하락하였다. 이는 계절조정 소비자물가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이후 가장 큰 폭의 하락이다. 1913년 소비자물가 통계를 작성한 이래 가장 큰 폭의 하락은 1921년 2월(-3.2퍼센트)에 있었으며, 대공황 시기인 1932년 1월에도 2.1퍼센트 하락한 적이 있다. 그러나 1947년 2월 계절조정 통계치를 처음 발표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관련 통계 작성 이후 가장 큰 폭의 하락이라고 할 수 있다.
식량과 에너지 부문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 또한 0.1퍼센트 하락하여 미국의 다우존스지수는 종가 기준으로는 5년 반 만에 8,000포인트 이하로 떨어졌다.
소비자물가는 하루 전 발표한 생산자 물가가 전월에 비해 2.8퍼센트 하락하여 이미 예견된 일이었지만, 시장 예상치(-0.8퍼센트)를 하회하여 시장에 준 충격은 적지 않았다. 이는 지난 7월부터 하락하기 시작한 유가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의 폭락에서 비롯되었다. 에너지물가(생산자)는 전월에 비해 12.8퍼센트 폭락하였고, 위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각종 물가는 에너지물가의 등락에 따라 부침을 반복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원자재 부문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의 하락은 가계의 ‘소비’ 침체에서 비롯되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금융 부문의 신용 경색과 부채 청산이 부(負)의 레버리지 효과를 통해 ‘부채 디플레이션’ 현상으로 급속하게 전이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11월 7일 발표한 고용지표 또한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비농업 부문 취업자가 10월 한 달 동안에만 24만 명이 감소하였고, 10개월 동안 취업자는 120만 명이 감소하였다. 통상 연간 200만 명의 취업자가 증가한 경험(2006년 230만↑, 2007년 130만↑)에 비추어 10개월 동안 120만 명이 감소한 것은 고용시장의 침체가 얼마나 심각한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이에 따라 고용률은 1년 전에 비해 0.9퍼센트 하락한 61.8퍼센트로 추락하였다.
고용시장이 악화되고 기업의 구조조정이 본격적으로 실시됨에 따라 실업자는 1년 동안 280만 명이 증가하여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이에 따라 실업률은 1년 전보다 1.7퍼센트 상승하여 6.5퍼센트로 치솟았다. 6개월 이상 장기 실업자는 전 달에 비해 25만 명이 증가하였고, 실업자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22퍼센트를 넘어섰다. 또한 고용시장 악화에 따라 구직을 포기하여 비경제활동인구에 편입된 구직단념자, 경제적 이유로 시간제고용 상태인 취업자 등을 포함하여 계산한 실질실업률은 11.8퍼센트로 치솟았다.
한편, 올 상반기만 해도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물가와 실업률의 동시 상승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경제를 괴롭혔다. 위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경기가 침체될 경우(푸른 색) 물가는 하락하고 실업률은 상승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경기가 호황일 경우(붉은 색), 상황은 역전되어 물가는 상승하고 실업률은 다소 줄어든다.
통상적 경기변동을 관찰하면 침체는 급속히 진행되고 상승은 완만하게 진행된다. 경기변동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고용지표는 경기가 침체될 경우 급격히 상승하고 경기가 좋아질 경우 완만하게 상승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올 상반기에 경험했던 스태그플레이션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극히 이례적인 현상으로, 1970년대와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바로 ‘오일쇼크’다. 경기가 침체되고 있음에도 비용이 상승하여 물가마저 끌어올린 비정상적인 국면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상품시장에서 규제가 강화되기 시작한 이후 7월부터 유가는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9월 금융 위기 국면에서 OPEC이 감산에 돌입했지만 경기 침체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유가는 재차 폭락하여, 시차를 두고 생산자물가와 소비자물가의 하락으로 전이되고 있는 국면이다. 따라서 상품시장에서 투기자본이 다시 비이성적 유가 폭등을 초래하지 않는 한, 이제 앞으로는 불황(Depression)과 물가하락(Deflation)이 경제 현상을 지배하는 ‘D’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했다고 할 수 있다.
2. 부채 디플레이션
■ 대공황과 부채 디플레이션: ‘모든 악의 근원’
1921~22년에도 공황이 발생했지만 20세기에 자본주의가 목도한 가장 큰 경제적 재앙은 1929년 대공황이었다. 대공황이 발생한 이듬해인 1930년 물가는 2.3퍼센트 하락했으며, 1931년에는 9퍼센트, 1932년에는 9.9퍼센트나 떨어졌다. 1933년에도 5.1퍼센트 떨어져 대공황 기간 소비자물가는 27퍼센트나 하락하였다. 1934년이 되어서야 3.1퍼센트 상승하여 디플레이션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대공황이 장기간에 지속된 것도 바로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현대 통화주의자들의 이론적 원류라고 할 수 있는 피셔(Fisher)는 1933년 ‘부채 디플레이션’ 개념을 통해 대공황을 설명하였다. 그가 대공황 분석에 집착한 것은 ‘신용’을 통해 주식을 대량 구입하여 1929년 주가 폭락 사태에서 파산에 빠진 개인적인 불행도 큰 몫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분석의 출발은 자신의 처지와 유사한 ‘과잉부채(Over-indebtedness)’였으며, 부채를 ‘청산’하는 과정의 결과로서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1) 부채 청산은 출혈 매각(distress selling)을 초래하고, (2) 은행 대출을 상환함에 따라 통화량(deposit currency)을 축소시키고 유통 속도를 줄어들게 한다. 출혈 매각이 촉발한 통화량과 유통 속도의 축소는 물가 수준의 하락을 초래한다.”(Fisher, 1933)
디플레이션을 ‘거의 모든 악의 근원’으로 보았던 그는 교환방정식에 입각하여 현상을 분석하였다. 즉 은행 대출을 상환하기 위해 부채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통화량이 줄어듦에 따라 물가가 떨어진다는 것이 그의 이론의 핵심이다. 통화량이 줄어들어 물가가 하락하면 화폐의 상대적 가치는 다른 재화에 비해 상승하는데, 채무자의 입장에서 부채의 실질가치는 더욱 증가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채무자가 부채를 상환하면 할수록 부채의 실질가치가 더욱 증가하는 악순환이 초래된다고 보았다. 한편 피구(Pigou)와 같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물가 하락에 따른 화폐의 실질가치 상승은 총수요를 자극하여 경기가 회복된다는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취급하였다. 엄밀한 주류 경제학의 입장에서 물가 하락은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현상이 아니라, 시장이 자연스레 조정되는 현상이다.
물가 하락에 따른 화폐의 상대적 가치의 상승을 받아들이면, 채권자의 입장에서 이득을 초래하지만, 채무자의 입장에서는 부채가 더욱 커지게 된다. 피구는 통상 ‘실질잔고 효과’라고 알려진 전자를 강조했고 피셔는 후자를 강조했다. 결국 경제 전체적으로는 상쇄된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견해에 비해, 신고전파 종합(신고전 케인즈학파)이라고 할 수 있는 ‘토빈(Tobin)’은 분배의 개념을 도입하여 피셔의 견해가 우세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일반적으로 채무자가 채권자보다 소득 수준이 낮다고 했을 때, 소비 성향이 높으므로 경제 전체적으로는 소비가 줄어들어 물가가 더욱 떨어진다고 보았다. 즉 소비 성향이 대칭적이라면 경제 전체적으로 소비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지만, 물가 하락에 따른 부채의 실질가치 상승은 총수요를 줄여 물가가 더욱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는 말이다. 실질소득이 정체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소비 성향을 지닌 미국의 중, 저소득층의 소비 감소는 더욱 심해질 것이며, 양극화가 심화된 현대적 상황에서 부채 디플레이션은 치명적일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 악순환으로 정리할 수 있다.
과잉부채 → 출혈매각 → 부채상환 → 통화량 축소(피셔) → 소비 감소(토빈) → 디플레이션 → 과잉부채 …
■ 민스키와 버냉키의 부채디플레이션
현대적 의미에서 부채 디플레이션 개념에 자산 가격을 통합한 것은 ‘금융불안정성 가설’로 유명한 민스키(Minsky)다. 그에 따르면 자산의 출혈 매각은 자산 가격의 하락을 초래하고, 이는 다시 자산을 매각할 것을 강요하여 디플레이션을 악화시킨다고 보았다.
부채를 상환하는 방식에서 피셔가 주로 ‘현금’에 의존했다면, 민스키는 추가로 차입을 해야 하거나 자산을 매각하여 부채를 상환해야 하는 상황을 강조하였다. 특히 금융 위기 상황에서 자산을 동시에 매각해야 하는 경우 자산 가격 하락으로 자본 손실이 발생하고, 담보 가치 또한 하락하여 또 다시 자산을 매각해야 하는 악순환이 지속된다고 보았다. 가령, 증권이나 현금을 담보로 주식투자 하는 경우의 반대매매도 강제 매각에 해당한다.
또한 채무자가 개별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손실의 한계가 존재하며, 이러한 한계를 초과할 경우 디폴트(채무불이행)로 인해 채권자에게 손실이 전가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본 손실이 연쇄적으로 발생할 경우, 초기 소득 감소를 넘어선 소비와 투자의 연쇄적인 하락으로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결국 자산 가격 하락으로 인한 ‘부(富)의 효과’가 민스키의 디플레이션 설명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악순환으로 정리할 수 있다.
과잉 부채 → 출혈 매각 → 자산 가격 하락 → 자본 손실 → 출혈 매각 + 소비 감소 → 디플레이션 → 과잉 부채 …
한편, 현재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인 버냉키는 대공황을 분석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대공황의 경험을 통해 이른바 ‘신용 채널’ 개념을 도입하여, 금융 위기가 실물 경제에 파급될 수 있음을 분석하였다.
물론 지나친 물가 하락이 은행 시스템에 영향을 미쳐 대출이 줄어들 수 있음은 이미 1930년대 케인즈가 경고하기도 했다. 또한 케인즈는 투자가 저축보다 선행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은행 체제의 신용 공급 하락이 총수요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아무튼 버냉키에 따르면, 대규모의 채무자 디폴트와 뱅크런이 발생하면, 은행의 정보 획득과 유동성 공급 비용이 높아져 금융 중개기관의 능력이 떨어진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대규모 지급 불능 사태와 담보 가치가 하락하는 상황에서는 신용이 양호한 차입자도 신용을 얻기가 어려워진다. 은행 입장에서도 역선택 문제로 차입자를 선별하는 비용이 높아진다고 보았다. 정보의 비대칭성을 강조하는 뉴케인즈 학파 입장에서 신용 위기와 실물 경제의 효과를 분석한 것이다. 그의 ‘신용 채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과잉 부채 → 디폴트 → 은행 기능 약화 → 신용 축소 → 지출 감소 → 디플레이션 → 과잉 부채 …
교환방정식에 따라 부채 디플레이션을 설명하는 피셔와 물가 하락이 화폐의 실질가치를 떨어뜨려 소비를 촉진한다는 피구 등 신고전학파의 설명을 제거하면 자산 가격 하락, 은행의 중개기능 약화, 양극화에 따른 실질부채 증가 등으로 소비와 투자가 하락하여 디플레이션은 지속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채널은 상호 복합적으로 연계되어 있으며, 현대적 의미에서는 금융기관의 부의 레버리지 효과를 통해 더욱 강화되는 측면이 존재한다.
3. 부(負)의 레버리지와 정부의 역할
■ 레버리지 축소가 진행되는 과정
통상 은행은 BIS비율(자기자본/위험가중자산)이 10퍼센트라고 했을 때 그의 역수인 레버리지 비율은 10이 된다. 이에 비해 투자은행이나 헤지펀드는 25~30의 레버리지 비율을 보인다. 특히 대규모의 레버리지 차입을 통해 투기적 거래의 대명사로 알려진 ‘헤지펀드’의 사례로 부의 레버리지 효과를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초기에 담보비율 15퍼센트로 자기자본 15를 투입하여 85를 차입했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금융 위기로 자산 가치가 5퍼센트만큼 하락했다면 이는 대부분 자기자본의 감소로 조정되어 레버리지는 올라가고(5.7→8.5) 담보비율은 하락하게 된다. 담보비율을 유지(마진콜 충족)하기 위해서는 차입을 줄이거나 자산을 매각해야 한다. 따라서 차입 규모는 85에서 56.7로 하락하게 된다.
만약 헤지펀드의 거래 상대방이 위험 자산을 반영하여 담보 비율을 20퍼센트로 올릴 것을 요구한다고 가정해 보자. 차입 규모는 40으로 줄어들게 되고 추가로 투자자들이 10퍼센트만큼 환매를 요청하게 되면 자산 가치는 45로 줄어들게 된다. 자산 가치의 5퍼센트 하락에 따른 마진콜, 추가 담보 요구, 고객들의 환매 요구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하여 자산 가치는 반 토막이 날 수도 있다.
2007년 6월, 서브프라임 사태를 촉발시킨 베어스턴스 산하 High-Grade Structured Credit Fund 청산이 급격히 발생하고, 모회사마저 파산하게 만든 것도 부의 레버리지 효과가 순식간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비단 베어스턴스 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헤지펀드가 JP모건 Asset Management(2007년 말 운용자산 447억 달러)인 것에서 알 수 있듯 헤지펀드와 금융기관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헤지펀드에 신용공여 라인 등 차입을 제공하고 지불 및 청산 등 각종 서비스를 공급하는 것도 이들 초대형 금융기관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5만 2,000명의 대규모 감원을 발표해 시장에 충격을 던져준 시티그룹 또한, 1988년 개발한 자회사인 SIV(구조화 투자회사)의 막대한 부실로 휘청거리고 있다. 시티그룹은 이미 657억 달러의 부실상각을 단행했으며, 웰스파고에 인수된 와코비아 또한 965억 달러의 부실을 발표하였다. UBS 또한 486억 달러의 부실상각을 단행하는 등 금융기관의 부실상각이 지속되고 있는 것도 부의 레버리지 효과를 차단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은행의 평가와 심사 기능이 신용평가기관으로 이전됨에 따라 현대 금융에서 신용평가기관들의 위상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들 신용평가기관들이 이번 금융 위기로 추락한 위상을 만회하기 위해 지속적 등급 하락을 단행하고 있는데, 이는 금융기관의 건전성 지표를 더욱 악화시키게 된다. 예를 들어 위험가중자산을 계산할 때 보유하고 있는 채권의 신용등급이 하락하면 BIS 비율은 떨어지게 된다.
아무튼, 금융기관의 부의 레버리지에 따른 자산 매각, 대출 축소, 신용 회수 등은 가계와 기업의 소비와 투자 하락을 유발하여 디플레이션은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전통적인 부채디플레이션 분석에 부의 레버리지 효과를 추가로 고려하면 다음과 같이 부채 디플레이션 채널을 정리할 수 있다.
■ 물가하락이 투자와 소비에 미치는 영향
물론 위의 부채 디플레이션 채널은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한 것이고, 기업 부문의 구조조정이 빠져 있다. 상품 가격의 하락은 기업의 수익성 하락과 직결된다. 기업 간 경쟁이 격화되어 물건을 팔기 위해 출혈 경쟁을 하게 되면 가격은 더욱 하락하게 된다. 개별 기업 입장에서는 수익성을 만회하기 위해, 생산량을 줄이거나 노동력을 해고하거나 임금을 줄이게 된다. 이는 개별 기업 입장에서 합리적 선택일 수 있으나, 경제 전체적으로는 고용과 임금이 하락해 소비가 줄어들어 가격은 더욱 떨어질 수 있다. 이른바 ‘구성의 오류’가 발생한다.
물론 불확실성이 높아져 기업은 이미 계획돼있던 투자 계획도 철회하게 되고, 신규 투자보다는 M&A 등 저가의 기업 인수에 매몰되어 투자는 더욱 줄어들게 된다. 부도나 파산에 직면한 기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소비 측면에서도 디플레이션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상황에서 추가적인 하락에 대한 기대심리로 내구재에 대한 소비는 줄어들 수 있지만 비내구재에 대한 소비는 증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고용이 악화되면 구매력이 떨어져 전체적인 소비 규모는 줄어든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정상적인 경제에서 중요하지 않았던 부(富)의 효과가 소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올해 전 세계 주식시장에서만 현재까지 32조 달러가 사라졌다. 미국의 가계가 소유한 주택 가치가 20~25조 달러로 추정되므로 20퍼센트 하락했다고 가정하면 4~5조 달러가 사라진 것이다. 가계가 지닌 담보 가치 하락은 대출 축소와 부채 청산을 위한 저축 증가로 이어지고, 현금 흐름의 감소는 소비를 더욱 축소시키게 된다.
■ 한국경제는 어디로 갈 것인가?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라지만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가 3년 전에만 발생했어도 한미FTA, 자본시장통합법, 금융허브 정책 등은 전면 재고되었을지 모른다. 반면, 3년 후에 발생했다면 한국 경제는 거의 재앙에 가까운 충격에 휩싸였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규제 완화-감세-민영화-한미FTA를 4대 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전면적으로 실시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금융 부문의 규제 완화로 헤지펀드를 비롯한 투기자본과 대규모의 파생상품들이 무차별적으로 도입되어 자본시장은 거의 아비규환이 되었을 것이다. 공공부문의 민영화가 대규모로 진행되어 유가 폭등 속에서도 공공요금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을 것이며, 법인세, 종부세, 양도세 등 돌이킬 수 없는 항구적 감세 정책이 추진되어 경기 침체 상황에서도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정부의 곳간은 텅텅 비었을 것이다. 엄청난 재정적자 탓에 정부는 확대 재정 지출에 대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식물 대통령-식물 정부로 전락했을 것이고, 국민 경제는 나락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미국 경제에 구조적으로 더욱 통합되어 금융 위기는 직격탄으로 다가왔을 것이며, 무역 적자 회복을 위한 미국의 파상적인 공세에 적자 규모는 갈수록 늘어나고 농업은 더욱 피폐해 졌을 것이다. 결국 미국의 금융 위기가 발생한 시기만 보면, 전자에 대한 아쉬움은 남지만 후자는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이다.
현실로 돌아와 규제 완화-감세-민영화-한미FTA, 즉 신자유주의 정책을 전면 수정하지 않으면 한국경제에 희망은 없다.
가계와 기업, 그리고 이를 신용으로 연결하는 금융기관을 현대 금융 경제의 3대 주체라고 한다. 그러나 가계, 기업, 금융기관 모두 신용 위기에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믿을 것은 정부밖에 없다. 이 비상 시국에 정부는 종합부동산세를 인하하기 위해 헌법재판소까지 동원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최근 은행의 건전성이 취약해 진 것은 다음 몇 가지에서 비롯된다. 우선, 가계 및 건설사에 대한 부동산 대출에 집중하여 부동산 거품이 빠지면서 부실대출의 위험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원화 가치 상승과 국내외 금리차를 이용하여 달러 및 엔화 단기차입을 통한 통화, 이자율 스왑 등 ‘차익거래’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부동산 관련 파생상품에 투자하여 대규모 평가손실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는 연간 수조원의 순이익을 창출했지만 호황기에 취해 대규모 배당으로 자기자본을 확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 물가 상승의 부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중앙은행은 금리를 내리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맞다. 또한 최종 대부자로서 유동성을 지속적으로 공급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CD, 은행채 등 시장성 수신을 총 수신의 일정 비율로 제한하는 정책을 선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이 시중금리의 인하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환경을 마련하지 않은 상황에서 금리 인하가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고 중앙은행이 지닌 ‘카드’만 버리는 꼴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전 세계 모든 금융기관의 BIS비율이 하락하는 상황에서 엄격한 BIS비율 준수나 제고를 강요하거나 압박할 필요는 없다. 근본적으로는 레버리지 효과를 완화하기 위해, BIS비율은 경기 변동에 맞게 탄력적으로 조정되어야 한다. 경기가 호황일 때는 BIS비율 기준을 높여서 자본금을 확충하도록 하여 대출 확대에 따른 버블을 방지하고, 경기가 불황일 때는 BIS기준을 조정하여 부의 레버리지 효과를 차단해야 한다.
최근 은행들은 BIS비율을 맞추기 위해 대출 회수와 후순위채 발행을 증가시키고 있는데, 은행의 건전성 및 거시경제에 부정적 효과가 적지 않은 상황이다. 무엇보다 은행의 대규모 후순위채 발행을 동시에 진행하여, 할부금융사, 카드사, 리스사 등 제2금융권의 채권시장을 위축시키고 있다. 상대적으로 양호한 은행이 7.8~8퍼센트의 금리로 채권을 신규로 발행하니 다른 채권의 만기 연장조차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후순위채 발행은 은행의 보완자본(Tier 3)을 증가시켜 BIS비율을 높이는 효과가 있으나, 조달 비용이 높으므로 시중금리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장기적으로는 부채 증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위험가중자산을 줄이기 위한 무차별적인 대출 회수 및 만기 연장 중단은 기업의 현금 흐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기본자본 대비 BIS비율이 건전성 기준의 핵심이므로 오히려 배당 성향을 낮추어 내부 이윤으로 전환하거나 증자를 실시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신용 경색과 불신이 팽배한 상태에서 은행 자체의 자구 노력에 한계가 있다면, 공적자금 투입을 통한 자본금 확충으로 은행에 대한 ‘안전성’을 높이는 방안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다음으로 외환시장을 감독할 책임이 있는 정부는 역외선물환(NDF) 시장에 대한 감독과 규제를 단행해야 한다. 각종 세제나 운용상의 제반 규제를 피해 조세, 금융, 행정 등에서 특혜를 누릴 수 있도록 뉴욕, 홍콩, 싱가포르에서 거래되는 선물환시장이 서울 외환시장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에서 선물, 옵션을 통한 프로그램 매수가 기초 시장을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분별한 역외 선물환 시장 확대로 신흥시장의 30퍼센트를 차지할 만큼 증가하였고, 국내 외환시장은 역외 선물환 시장을 추종하는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래 NDF시장은 국내에 들어온 외국투자가들이 환율 변동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만든 선물환시장이지만 지금은 환차익을 노린 투기 거래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또한 정부는 적극적 재정 지출로 유효수요를 창출해야 한다. 한시적으로 중소기업과 중저소득층에 대해서는 감세를 실시하되 대기업과 자산 소득에 대한 항구적 감세는 중단해야 한다. 또한 재정 지출은 공공부문 투자를 통해 일자리를 만드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사회복지 사업에 직접 지출하는 것도 좋지만, 인프라가 부족한 상황에서 인프라 구축에 집중 투자하는 편이 고용 창출과 중소 건설사 회생에도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노후한 학교, 도서관, 공립병원 등을 전면 보수하고 보육시설, 요양시설, 보건소, 구민회관 등 사회복지 사업 확대를 위한 각종 인프라를 새로 정비하거나 구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을 전면 바꿔야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도 만취한 운전자는 사고를 내기 마련인데, 망가지고 있는 자동차에 운전면허증도 없는 만취한 운전자라면 그 자동차의 최종목적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경제적 기초가 아무리 튼튼해도 현 경제 관료들은 언제든지 순식간에 기초를 붕괴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다. 비상경제내각을 통해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리더쉽’을 회복하지 않으면 수십, 수백 조를 쏟아 부어도 죽은 경제는 살아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국민과 시장의 원성을 사고 있는 재정경제부 장관의 교체만으로는 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 금융위원회를 비롯한 금융시장의 건전성과 안정성을 감독하는 수장들이 민간 금융시장에서 나오는 관행은 중단돼야 한다.미국의 사례에서 보듯, 월가에서 경제 관료가 배출되면 그들은 필연코 금융시장 발전을 저해한다고 믿고 있는 규제와 감독을 완화하기 위해서만 노력하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정부가 추진한 일이라고는 국민 경제의 건전성과 안정성을 위해 만들어 놓았던 각종 세제, 법률, 제도, 기구 등을 폐지한 것이 전부 아닌가. 금융 부문의 규제와 감독을 강화하여 금융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고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는 사람들로 교체해야 한다. 현재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는 전대미문의 경제지표들을 발표하고 있는 상황이다. 내년 상반기 한국 경제도 마이너스 성장률의 가능성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비상한 각오로 우둔하고 어리석은 발상들을 한시바삐 전환하기를 기대해 본다.
여경훈 khyeo@saesayon.org
http://www.saesayon.org/sight/sightview.do?paper=20081125103719568&pcd=EA01